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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1일은 임시정부 수립일입니다.~ 끝나지않은 독립운동과 친일논쟁

역사와시사/역사 제대로 알자

by 이즈원 2023. 4. 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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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과 정부수립 논란
#제주 4. 3 항쟁
#여수 순천 사겐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4월 11일은 임시정부 수립일이다.
삼일운동의 영향을 받아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출범하였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19.3. 1 삼일운동
19.4.11 임시정부 수립
48.4.3 제주 4.3 항쟁
48.5.10 총선거
48.5.31 국회개헌
48.7.17 헌법제정
48.8.15 정부수립 선포(미군정 종식)
48.10.19 여수순천 사건

48년 7월 17일 만들어진 헌법에 따라 8월 15일 정부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와 관련 이날이 되면 점화되는 게 건국절 논쟁이다. 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할 것인가? 해방 후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할 것인가? 하는 논란이다.

임시정부 의정원 요인들

48년 만들어진 제헌헌법은 "기미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로 그 법통을 명시했고 개정된 현행헌법 또한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로 되어있다.

그런데 왜 건국절 논란이 일까? 굳이 건국절을 정하려면 헌법에 따라 4월 11일로 하면 될 건데 왜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하자고 할까.
의미가 달라져서이다.
친일파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공로자로 역사에 남겨지고 싶은 것이다

해방 전 이미 강대국의 분단 시나리오에 의해 신탁통치가 기정 사실화된 대한민국은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신탁통치로 가닥을 잡아간다.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 이승만과 김성수(친일파)의 한민당이다, 해방 후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까지 친일파에 대한 청산은 미루어졌다. 1948년 개헌국회는 여론에 밀려 반민족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친일파 청산 작업에 돌입한다. 하지만 행정부와 친일경찰고위층, 친일파의 훼방으로 49년 8월 반강제로 해산된다.
이게 가능하나 하겠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국회와 행정부 사법부 검찰까지 친일파들이 장악하다시피 되었고, 권력유지를 위한 이승만의 권력욕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친일파들이 처벌될 경우 권력통제가 힘들다고 판단 반민족특별 위훤회 해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해방이 된 상황에서 친일파청산작업을 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컸고, 제주도에서 반정부 폭동으로 이어졌다. 47년 28주기 삼일절 기념식 현장에서 말을 탄 경찰이 어린아이를 치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항의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친일경찰들과 제주도민들의 묵은 감정은 다음 해인 48년 4월 마침내 폭발했다. 정부는 이를 남로당계의 폭동이라 규정하고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폈고 7년 동안 계속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죄 없는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게  된다. 당시 제주도민의 1/3이 피해를 입게 된다.
제주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투입된 부대가 여수순천에 주둔하던 14 연대였고, 이들은 제주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대해 양민을 죽일 수 없다며  그해 10월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정부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 이승만 정부는 백선엽(일 관동군 장고 출신)을 총대장으로 하여 여순반란군인에 대한 진압작전을 시작하고 이때도 마찬가지로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은 군인과 경찰 그 가족들(150명)을 죽였으며, 진압군은 민간인(1500명)을 죽였다고 한다.
남북분단과 역사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다.
제주 4.3과 여순사건은 어쩌면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주도하던 정부에 대해 국민적 반감이 폭발한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에겐 최대위기였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폭동자 외에 관련자 및 주변인까지 모두 빨갱이로 죽이는 끔찍한 행위를 거침없이 저지르게 된다.
결과론적이지만 친일청산을 미적거리는 이승만정부와 미군정에 대해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친일청산 의지가 강했던 북에 대해선 호의적인 경향도 있었다. 이념 때문이 어니라 그만큼 수백 년을 유지되어 온 왕  중심의 봉건제와 양반중심의 사회구조에 대한 반감, 결정적으로 친일파들의 득세가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끝나지 않는 친일세력과 민족의 현대사이다.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있고 조선 동아를  중심으로 한 언론, 사법부와 경찰 검찰, 군을 장악한 친일세력이 있었다. 제주와 여수사건은 친일파들에게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자신들의 전과를 숨기는 기회가 되었다


열거한 이 부분만 이해해도 왜 이승만이 국부자격이 없는지 백선엽이 국립묘지에 묻히면 안 되는지 건국절을 왜 48년 8월 15일로  하면 안 되는지가 이해될 것이다.
1950년 한국동란은 강대국에 의해 나뉜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워야 함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싸웠고 지켜냈다. 전쟁 앞에서 모두는 하나가 되었고 오로지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이승만과 김일성이란  권력욕 강한 자들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자신을 위해 나머지는 모두 소모품으로 생각한
한번 더 말하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가가도 건국의 아버지도 아닙니다. 조국과 민족의 피를 빨아 입신양명을 추구한 인물입니다. 그걸 알 때 친일파들과 권력과 금력에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당시의 한 명이 되어 생각해 보십시오.
일본에 부역해 영화를 누리던 자들이 해방 후에도 사회지도층이 되어 버젓이 돌아다닌다.그것도 정부의 보호아래
당신은 정부를 지지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였겠습니까?
그 반대라면 당신은 친일파들에 의해 빨갱이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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