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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두얼굴의 이승만 2'

역사와시사/역사 제대로 알자

by 이즈원 2023. 4. 2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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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

이승만은 자신의 신격화와 우상화에 헌신적이었다. 그런 그의 헌신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국부란 헛소리를 공공연히 하는 역사 무지렁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다 알려줘도 믿지 않는 게 죄다.
정부 초기 이승만의 동상은 계속해서 세워지고. 지폐와 주화 12종에 이승만이 등장한다. 독립투사 모방가 이승만의 과거 지우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으나 아뿔싸 권력추구형 그의 치세는 해방 이후에도 못지않게 진행형이었으니...
건국대통령?, 국부?
개 이름도 아니고 이 단어가 함부로 아무 데나 붙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서울 남산 공원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 동상 제막식(56년8월15일)

1948년 제주 양민에 대한 군과 경찰의 무자비한 학살에 동참할 수 없다며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여수, 순천에서 반기를 드는 항명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만들어진 게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만들어져 반정부 인사나 국민들을 탄압하는 악법으로 자주 거론된다., 군사정부에서는 민주인사들을 탄압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존폐의 갈림길에서 논란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정치범을 합법적으로 잡아 가두는 법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승만은 여기에 반공법을 더해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3.15 부정선거 등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빨갱이나 적색분자로 몰아 억압하고 살상하며 그 행위를 정당화 시켰다.
빨갱이란 명목으로 진행된 양민학살은 제주 4.3을 필두로 한국동란포함 정권붕괴 시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는데
보도연맹 학살사건, 대전 산내 학살사건. 경남코발트 탄광, 문경, 거창, 산청 강화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자행되었다.
6.25 전쟁은 친일파들이 대거 국민적 영웅으로 탈바꿈하는 기회가 되었다. 일본에 부역하던 그들이 대한민국 군의 최고수뇌부와 주요 요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과 영웅의 두 갈래 길에서 아직도 국민적 갈등을 유발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단초는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승만 도안 지폐와 주화

어제가 4.19 혁명 63주기이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이 집권을 위해 활용한 대표적 집단이 경찰과 서북청년단이란 조직이었다. 경찰의 주요 요직은 면죄부를 받은 친일경찰 출신들이 차지하며 독재정치를 방어해 주는 역할을 하였고, 서북청년단은 시민단체로 위장해 이승만 장부의 자금지원과 방조아래 정치테러 및 관제시위를 주도하던 단체였었다. 이 단체는 보수정부가 정권을 잡을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임화수 유지광, 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이 활개 치던 시기가 이맘때쯤이다.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시기,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시기, 한몇 년 잠잠하더니 윤석열 정부 들어 또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자신들은 애국 단체라 하지만 그들이 하는 집단행동은 이승만 정부 당시 주임무였던 관제데모(정부의 폭정을 지지하는 시위)에 가깝다. 누군가가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경찰 권력은 4.19 혁명으로 인해 자유당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며 약화되었으나 이도 잠시  5.16 쿠데타 이후 군과 안기부 검찰이 그 권한을 대체하게 된다.
군은 1948년 허정 과도정부 시기 이종찬에 의해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으나 주요 사건 발생시마다 한축으로 등장하고 있다. 기무사 계엄령 문건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하면 된다.

권력욕이 강한 이승만은 아부와 명령에 충직한 관료들만 자신의 주위에 포진시켰다. 별반 지지기반이 없던 이승만이 국회의장을 하고, 초대 대통령이 된 건 그의 기민한 외교술 덕분이었다. 이를 통해 정적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을 밀어낼 수 있었고, 미국을 든든한 후원군으로 둘 수 있었다. 하지만 내치는 정 반대였다. 동란 이후 계속된 폭정과 부정선거, 백색테러, 봉건시대로 회귀되는 노동과 계급정책들은 자연 국민들이 등을 돌리게 허였고, 붕괴직전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무능한 관료들 덕이었다. 이승만에 의해 임명된 관료들은 이승만을 지켜주는 또 다른 한축이었다.
국방부장관 채병덕과 김종원(양민학살 지휘관) 신성모(국민방위군 사건 책임자), 무능 내무부장관 최인규, 그리고 측근이었던 서북청년단의 배후 곽영주는 4.19 때 민간인 발포를 명령한 자이다.
그리고 자유당의 이인자였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고령으로 사리판단조차 힘든 이승만을 대신해 전횡을 일삼던 자들
"외교는 귀신 인사는 등신"이라는 유행어가 나돌 지경이었으니...
이런 이승만의 해방 후 행적은 동란 이후 어려웠던 국내정세와 경제난 등으로 군이 주도하는 5.16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애석한 건 혁명정부 또한 이승만 휘하의 관로들과 친일파들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에도 불구 현재까지도 부정적 시선을 받는 대목으로 꼽힌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민족이 나아갈 길에서 이승만을 독재자라 칭했다.
아이러니한 건 박정희를 구국의 영웅이라 지칭하는 사람들과 뉴라이트 같은 단체들이 이승만을 국부라 하고, 심지어 현 정부와 보훈처는 기념관을 짓겠다고 하니 그들의 정체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이승만의 죄목은 나열하기도 힘들다
교민들이 모아준 독립운동 자금을 착복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폄훼한 죄, 일 친일파 청산을 방해한 죄, 지나친 반공주의로 6.25의 단초를 제공한 죄, 죄 없는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죄, 현대사의 관제데모, 백색테러, 정경유착, 테러를 정치에 처음 도입한 죄, 권력을 위해 이념갈등을 조장하고 국론 분열을 획책한 죄.
이게 국부의 자격이 있는 것인지, 독립기념관에 그의 족적을 기록하는 게 맞는 일인지...
다시 한번 숙고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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