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
국정교과서로 시끄럽던 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 Part1 정리한 내용입니다.
이외 영상에서 언급하지 않은 이승만 관련 뒷얘기도 많으나 과외로 빼고 그 내용을 주로 해 정리해 봤습니다.
참고로 찾아보시면 다 있었던 사실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고 누굴 비하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삽화 일부는 캡처한 영상을 사용하였습니다
part2까지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거기에는 미국의 어두운 정치역사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런지 현재는 모두 삭제되어 찾을 수가 없네요
아돌프 히틀러에 조력하던 조셉 궤베스는 우리가 어떤 나라를 쳐들어가면 그 나라의 민중들은 저항하는 부류와 우호적인 부류 그 사이의 다수의 민중들로 나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어느 쪽에도 서지 못한 다수의 민중들이 있었다
친일파들 중 더러는 간도특설대에 들어가 독립군을 소탕했고 더러는 조선총독부 산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당시 간도특설대에 몸담은 이들이 해방 후 국군을 지휘한 백선엽 김일백 같은 자들이다. 참 웃기는 역사죠
최근 보훈처에서 이승만 기념관 얘기가 공론화되며 발맞추어 기념관 건립 예산을 배정하겠다는 정부의 의중이 들린다 정말 친일의 후예들 징글징글하다
이승만은 구한말 조선의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이었으나 권력 상층부에는 가보지 못했을 정도로 아웃사이더였다
이승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기회주의자이다
대표적 친일파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나 사이비목사 전광훈 같은 자들은 심지어 이승만이 3.1 운동의 숨은 공로자라고까지 칭송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승만은 둑립운동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시늉만 했기에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1896년 독립협외가 만들어질 당시 발기인으로 잠깐 얼굴을 비추었고 그 후 미국으로 가기 전 그의 행적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에 있을 당시 독립운동가 코스프레는 했지만 항상 주변을 살피며 자신을 포장하는데 더 열을 올렸을 뿐이다.
그의 이러한 내재된 성향은 건국 후 화폐에 가장 많은 사진이 들어간 걸로도 유명하며, 자신의 동상을 설치한 개수가 많은 걸로도 확인된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가들과 인증샷 남기는 걸 좋아해 항상 기록으로 남겨 그걸 자신의 정치적 증빙으로 활용했다.
기밀문서였으나 해제된 미국 CIA 이승만 인격 조사 문서에는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던 이승만의 처세술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조선으로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파고드는 기독교를 등에 업기 위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한인 목회자를 내세워 교세를 넓히려는 기독교단의 추천에 의해 1903년 최초의 한인 목사가 되기 위해 워싱턴대에 특별생으로 편입하게 된다. 이어 하버드에도 같은 방법으로 수학했으나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미룬 채 다시 프린스턴 대를 들어간다. 웃기는 건 자신의 능력이 아닌 미 기독교단의 힘을 등에 업고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일자무식 하층민이었던 미 한인사회에서 이승만은 그걸 바탕으로 한인을 대표하는 주류가 되기 시작한다.
이승만의 본격적 악행들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카쓰라 태프트 밀약 이후 우호적인 미일관계를 이용하여 일본을 찬양하는 글들을 자주 썼으며.(위싱턴 포스트지 나 호놀룰루 신문에 기소된이싕만의 글을 인용하기 바란다) 더불어 미국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와 별도로 한인들 앞에서는 독립을 열거하며 철저히 이중적인 삶을 산다.
이승만은 손가락 끝에 입김을 불어넣는 습관을 자주 보였는데 고문당한 후유증이라고 거짓말을 둘러댔다.(대한제국 독립협회(구한말) 결성 당시 감옥에 투옥된 게 전부인데) 한인사회는 이 거짓말에 고무되었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이 늘어났다.
맹목적으로 나를 따르라
이승만이 이때 치지 한인들에게 한 말이다.
그때 미국에 있던 한인 대부분은 영어도 못하고 주변 정세에도 어두웠다. 이에 반해 이승만은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YMCA를 비롯한 기독교에서도 인정하는 인텔리였으니 그의 감언이설에
무조건적으로 이승만을 따랐다.
지지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첫 번째 목적은 박용만이 있던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하는 것이다 순전히 국민회 성금이 욕심나서이다. 그는 이를 위해 깡패들을 동원해 살인을 저지르고 증인들을 협박하는 테러까지도 감행하며 심지어 총기까지 사용되었다 한다.
이승만은 마침내 국민회를 장악한다.당시 미국언론에서는 한인사회의 이같은 갈등을 대서특필 되었다
주) 박용만은 한인 지식인으로 군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사관학교를 세웠고 미 한인사회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던 인물)
하와이 한인회를 손에 넣은 이승만은
국민회의 재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교포들이 학교를 세우기 위해 모아둔 돈을 착복하고 한인학교들을 하나씩 매각해 자신의 부를 채웠으며, 반발이 있을 시 깡패들을 동원해 입막음을 했다.
왜? 보수정당들이 재외국민투표에서 매번 밀리는 줄 아는가?
아마 이러한 부분들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된 당이 현재 대한민국 보수정당이니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결성되고 이승만을 잘 모르던 기독교(평양, 서울) 출신 임정요인들에 의해 대통령으로 추대된다.
아래 영상의 편향적 가치관은 이때도 여실히 나타났던 모양이다.
이승만의 매국짓은 이때부터 본격화된다. 임시정부 명의로 채권을 발행하고 미 전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순회를 하였다. 명목은 활동이었지만 순회 시 젊은 여성을 항시 동석시겼고 모금한 독립자금으로 자신의 향락을 즐겼다. 그러던 이승만이 미경찰에 체포된다. 많은 여성들과 불륜에 가까운 행적을 이어가던 그에 대한 진정이 받아들여졌고 주 법률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의 처세술은 다시 한번 반짝인다. 하와이에서 재판을 받기를 요청해 승낙을 얻은 다음 독립자금을 뇌물로 쓰며 하와이 미 유력자들을 포섭 유효한 증언을 얻고 풀려나게 된다.
정치적 위기를 맞이한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 1년 만에 상해를 방문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1920년 간도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은 대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나 여기서 김좌진 홍범도는 10배가 넘는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시점이었다. 이승만의 방문은 이를 치하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목적이었다. 임정은 고무되었고 향후 독립운동 방향을 세우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강경투쟁을 기피하며 모든 의견들을 묵살한 채 연두교시를 통해 때를 기다리자는 말로 얼버무리게 된다. 이에 임정 간부들이 항의하였고 대통령이 정부에 있어야지 왜 미국에 거주하려냐며 따졌고 이승만은 대외활동을 이휴로 홀연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일본에 대한 공세가 강화될 경우 보다 더 많은 독립자금이 필요할 것이고 그건 곧 자신의 수입이 적어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돌발행동에 그를 지지하던 임정 의정원도 등을 돌리고 탄핵 권한중지카드를 꺼내 들었다.
화가 나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상해 임정으로 보내지는 독립자금을 끊어버렸다.
미국 거주 한인들은 고생해서 번 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기탁했고 임정의 재무부를 통할했던 이승만은 한인들이 모아준 자금의 13%만 임정으로 보내고 나머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해 왔다.
이승만과 임정의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상해 임정에서 이런 이승만의 횡포에 당시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을 리도 없고 이동도 불편했으니 자연 임정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잠은 청사에서 자고 음식은 동포들에게 구걸해 살았다하니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때 김구가 등장한다. 그는 일본에 직접적인 타격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대한애국단을 조직하게 된다. 1931년부터 일본을 직접 타격하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폭탄의거가 이어진다
폭탄의거에 감복한 중국 장개석은 임정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반면 이승만은 이때도 어리석은 짓 작작하라며 임정을 비난했다.
이승만으로 인해 한동안 침체된 독립전쟁이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우호적이었던 미일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어졌고 미일 사이에서 박쥐처럼 줄타기를 하던 이승만은 재빨리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의 발전을 이룩한다던 과거발언들을 바꾸며 일본과 싸워라며 독립운동가 행세를 헌다. 한편 국내진공작전 이글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 미국 OSS는 독립군과 손을 잡기 위해 이승만과 접촉을 했으나 곧 이승만이 이를 대외선전용으로 활용할 뿐 생각이 없다는 걸 간파하고 이승만을 비켜 상해 독립군과 이범석과 직접 접촉하게 된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주류로부터 점차 소외되자 다시 자신의 지위를 다지기 위해 맥아더와 접촉하게 된다. 국내침공작전을 계획하던 중 일본이 항복아자 강대국들은 한반도 분할을 모의하고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더 적극적인 구애를 한다
1945년 10월 마침내 일본에 주둔군 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를 만나러 이승만이 도코로 가게 된다..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맥아더는 미국의 국익을 택했고 이승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한반도 신탁통치라는 의견에 찬성표를 던지며 다시 부상한다.
과외 얘기지만 일본의 조선병합을 정당하다 머 대놓고 일본을 추켜세우던 스티븐스를 장인환의 도움으로 전명운이 사살하게 되죠. 이에 영어가 유창한 이승만에게 변호를 요청하니 이승만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하죠 인간성이 보이는 단면이죠.당시 우호적인 미일관계에 끼어들어 주목을 받고싶지 않았겠죠.
이승만은 국부의 자격이 없습니다.
이승만을 국부로 만들려는 의도는 국내 극우친일파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을 국부로 만들어야 자신들이 과거 잘못이 이승만과 함께 역사 속에 묻히기 때문입니다.
조선 병합을 낙후된 조선을 일본이 근대화시킨다는 식민지 근대화론 이게 일본의 주장이고 공교롭게도 이승만과 그 배후세력들이 이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1945년 10월 미국이 한반도에 입성한다. 다시 우리 민족은 나뉜다.
자주독립정부를 세우려는 독립운동가들과 친일파 김성수(동아일보창업자) 송진우(일진회) 장덕수가 주축이 되어 설립된 극우정당 한민당 정부수립초기 이승만은 이들과 한배를 타다가
후에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이들과 결별한다. 하지만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행했던 반민특위해산 여수순천과 제주 양민 학살사건은 이승만이 무덤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과오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패착은 오늘날까지 한국사회를 진보와 보수가 대립된 이념갈등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국힘 정진석, 이승만 출생 148주년 맞아
"우남은 혁명가이자 기린아" 정진석의 조상 또한 친일파니 이해가 간다.
해방 이후 이승만의 행적은 더 드라마틱하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한민국 정부를 세운 것, 그리고 6.25의 행적 여기에 부정선거까지 안타깝게도 우리 역사교육은 이를 제대로 조명해 가르치지 않습니다. 단지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정도지
해방 후 행적은 한번 더 정리해 올려드리게요 알지만 제대로 모르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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