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육영수 여사를 기리며

역사와시사/역사 제대로 알자

by 이즈원 2023. 3. 25. 16:35

본문

1974년 어느 오후쯤이라 생각된다. 당시 대구의 신천동에 살고 있었는데 수군거리는 어른들의 표정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뭔 큰일이 났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는 뉴스를 곁눈질로 보면서 그 어두운 표정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당시 국민학교 2학년의 나이.

알아야 얼마나 아는 나이일까마는 안타까워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연일 비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TV로 보면서 한동안 같은 동병상련의 슬픔을 느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인자한 어머니 같은 육영수 여사의 성품을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생전 모습이 돌아가신 어머니와도 많이 닮아서였는지 모르갰지만 많이 안타까워했다는 건 분명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퍼스트레이디는 있었고,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후 그 자리는 또 누군가에 의해 다시 대물림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이순자 씨, 김옥순여사, 이희호여사, 권양순여사등 여러 명의 퍼스트레이디가 한 시대를 거쳐갔다. 많은 퍼스트레이디가 있었지만 물론 그중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던 프란체스카여사나 공덕휘 여사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기억보단 유독 육영수 여사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한 건 왜일까?

기껏해야 내가 아는 건 한복을 자주 입었다는 것과 가끔씩 저녁뉴스에서 보는 그녀의 대외활동 이미지가 다인데....

블로거를 통해 기대와 달리 작고한 박정희 대통령의 부정적 이미지만을 닮아가는 듯 보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이 안타까워 비판글을 많이 올렸다.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으로 육영수 여사의 전기를 검색해 읽다 보니 너무나 비교되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나뿐일까?

 

박정희 대통령 내외

박정희 대통령.

다까끼마사오란 이름으로 일본관동군에 복무한 것도 사실이고, 일본천황에 충성혈서를 쓴 것도 맞다. 여순반란 사건 때는 좌익으로 분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것도 맞는 말이다. 당시 형과 첫째 부인이 최고형의 처벌을 받은 걸 감안하면 정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것이라 해도 진배없다. 그런 그가  6,25 전쟁 때 피난 중이었던 부산에서 육영수 여사를 만나 이듬해 결혼을 한다. 어쩌면 여사와의 만남이 박정희전 대통령에 있어선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의 빛나는 업적 이면엔 형량 하기 힘들지만 그의 어두운 면을 밝은 곳에서 얼마라도 상쇄시켜 준 육여사의 보이지 않는 공이 지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16은 우리 역사의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아직까지 혁명이냐 쿠데타 이냐를 놓고 갑론을박 중이지만 결과론적이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먹고살만한 나라로 바뀌는 시발점은 된다고 본다. 다만 일부 추종자들의 지나친 맹신과 그 과정에서 생긴 과오들에 대한 반성이 형식적이어서 인간 박정희의 면모가 너무 감추어진 채 허물만 드러나는 것 또한 안타깝다. 육영수 서거 후 그녀의 죽음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이가 바로 남편인 박정희 일거고 그의 이러한 면모는 당시 지근거리에서 박정희를 모신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일설에 따르면 관동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하는 말들도 있는데 시기적으로 볼 때 직접적 토벌활동에 나선 기록은 없어 보인다. 박정희는 1952년, 60년, 62년 세 차례 혁명을 시도했다. 앞의 두 번은 이승만 정권을 없애기 위한 혁명이었다. 박정희가 자신의 젊은 날 과오를 반성하고자 그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었고 독재로 치닫는 이승만 정권을 없애려고 한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박정희 말대로 구국의 결단으로 일어났다는 5,16.

지난 과거지만 작고한 김수환 추기경의 말처럼 육영수여사가 서거하지 않았다면, 유신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억지주장으로 무시해 버릴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건 육영수 죽음 이후 박정희는 많이 고독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유신은 그 고독감을 떨쳐내려는 한 남자의 또 다른 탈출구였는지도. 이렇게 보면 박정희에 있어 육영수는 아내 이전에 마음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육영수 여사

- 1925년 옥천출생 배화여고 졸업 후 옥천중 여교사로 재직 6,25 동란 때 부산에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를 만나 이듬해 결혼 근혜, 근령 두 딸과 지만 아들 하나를 두었다.

- 퍼스트레이디로 사회의 어두운 곳울 보듬어줌

- 1974년 8.15 기념식 행사에서 문세광의 대통령 저격 시 총에 맞아 서거

여러 해 전에 육영수여사의 일대기를 영화하 한다 해서 큰 기대를 가졌던 적이 있다 결국 그렇게 되진 않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육여사가 이렇게 기억되는 건 아마 그녀가 설아 생전 남겼던 발자취가 가히 칭송받을만해서가 아닐까?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육영수여사 비서인 정재훈 씨에 따르면 그녀는 되도록 많은 국민과 대화하고 여론을 수렴하려 했으며, 억울한 민원이 생기면 비서진이 가서 해결하게 만들었다 한다. 이러한 그녀의 국민에 대한 사랑은 수해시 달랑 비서 한 명만 대동한 채 수해현장으로 달려간 그녀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육여사는 국민들에게 들은 여론을 종종 남편인 박정희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측근들 조차 꺼내기가 힘들었던 화두들도 상당히 있었다. 이런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청와대 내의 야당 이란 별호가 따라다녔고 재야여론을 수렴해 박정희에게 건의했을 정도니 박정희 또한 여기 야당이 있으니 말조심 하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그녀는 어린이와 보건문제, 여성, 장애인등 소외받는 계층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기울였다고 한다. 어린이회관과 육영재단은 다 그렇게 해서 건립된 것이고, 당시 아무도 관심 주지 않았던 한센인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이 당시 감동한 한센인들이 소록도에 육영수 여사 추모비를 세웠다 하니 그녀의 인자함과 성품이 보통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한센인들이 모여사는 소록도는 그 후 이희호 여사가 영부인으로는 처음 방문해 알려지기도 하였다.)

"여러분은 가장 비참한 운명 속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불구의 몸이지만 못할 게 없습니다."

                                                                                                                           ~ 소록도 연설 중 일부

소록도의 자녀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열어준 일은 보여주기 치장처럼 보이는 그런 연출된 부분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또 하나는 신사임당을 현세에서 보는듯한 그녀의 성품이다.

대부분의 위정자가 그러하듯 박대통령의 여성편력 또한 많았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사회전반의 기류였던 시기라 인내하며 남편을 보좌하던 여사의 현모양처 이미지가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인자는 단명이라 여사의 서거를 아쉬워하는 아들은 아직까지 주검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국면전환을 위한 계획된 음모라고 까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시대상은 김대중 납치사건과 일본의 경제지원 중단으로 어려운 국면이었으나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정부는 이러한 위기국면을 타개하는 돌파구가 되었다.

예전에 황철우 작가는 "스러진 달"이라는 책을 통해 육영수여사 서거에 대한 미스터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책에서 문세광이 아무런 제지 없이 권총을 반입했던 일, 좌석 있는 초청장을 발급받은 사실들이 누군가 사전에 미리 계획을 알고 도와준 유력한 제3의 인물이 있지 않나 하고 추론한다.

이러한 합리적 의심은 오래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 보도된 당시 동영상에서도 확인된다.

박정희가 당시 재빠르게 단상뒤로 몸을 숨기는 장면이나 문새광의 총구 방향과 박대통령과 영부인의 거리, 그리고 영부인이 쓰러진 방향등이 또 다른 제3의 인물에 의한 계획된 저격이 아닐까 의심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사실관계를 밝혀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는 나 또한 최고권력자의 옆에서 바른 직언을 할 줄 알았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 자애로웠고, 남편의 영적인 동지로서 조력자였으며, 동시에 검소함과 소탈함을 지녔던 영부인으로서 만인의 어머니였으며, 미쳐 관심 가지지 못하던 사회의 아웃사이드를 챙겼던 그녀의 영부인 이상 가는 삶 자체가 오늘날 너무나 이기적이고 소수이익에 맹주 하는 위정자들을 보며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박정희가 어두운 음지를 통해 양지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면 영부인은 거기서 조차 음지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곳을 양지로 끌어내려했다.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를 흠모하는 이면에는 전혀 다른 육영수의 행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또다시 우리나라가 육영수 같은 영부인을 만날 수는 있을까?

다른 영부인들의 활동들이 못내 아쉬운 건 육영수 여사의 이런 삶이 너무나 헌신적이고 자애로워서 다른이가 가히 범접하기 힘들어서가 아닐까? 아쉬운건 현 대통령이 왜 이런 어머니의 인품을 닮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재임 시 국정운영이 어머니 육영수여사를 벤치마킹 했다면 적어도 국민들의 경제적인 건 몰라도 마음은 한결 여유로웠을 텐데 말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