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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천 가볼만한곳 ] 제천 배론성지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일상이야기/종교

by 이즈원 2023. 9. 2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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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배론 성지
#충북기념물 제118 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님
#황사영 백서사건
#성요셉신학교

제천 방문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할애해 걸었던 곳이다.


배론성지는 강을 중심으로 좌엔 성모마리아 기도학교와 대성당, 최양업신부 조각공원이 있고 우로 성요셉성당, 순교자무덤, 배론신학교등이 나누어져 있다.

배론성지와 관련해 세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첫째는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신유박해를 피해 베론의 토굴에 몸을 숨겼던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부당성과 조선 교구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 등을 간추려 비단에 적어 알리려 했으나 전달책이 잡히면서 수포로 돌아간 사건.
황사영은 말미에 조선을 청나라의 성으로 편입하거나 조선에 청병 5만을 파견해 관리토록 해달라고 요청해 당시 조선의 실세들을 놀라게 하였다.


최양업신부는 서양음악을 우리 음악과 접목시켜 천주 가사를 만들었다. 박영희 작곡가는 이에 감명받아 길 위의 천국이란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박해의 부당성과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 건 좋았지만 그것 때문에 나라를 청의 속국으로 편입해 달라는 요청은 너무 나간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둘째는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해  처음으로 세워진  성요셉 신학고가 있던 곳이다.
성요셉 신학교는 최초의 사제양성 교육기관이라 보면 된다. 신학교 설립에 공헌한 분의 동상과 옛 신학교를 재현해 놓았다. 초가집 뒤에 황사영 토굴이 있다.


셋째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톨릭 사제인 최양업(세례명 토마스) 신부의 묘가 있는 곳이다.
최초로  천주가사를 우리말로 썼고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한글 보급에도 힘썼던 분이다.


입구 우측 야외 공연장이 있는 방향을 따라가면 십자가의 길과 성직자의 묘, 최양업신부의 묘를 만날 수 있다. 다 적기 어려워 패스다.


주차장 옆 성모마리아 기도학교이다. 미사를 드리기 전 이곳에 먼저 들러 기도로 마음을 정결히 하는 것 같았다.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와 대성당 사이의 인생미로이다. 삶은 미로처럼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 중심엔 늘 하나님이 있고 미로를 따라 걸으며 자신의 지난 시간을 반추해 보라는 의미가 있다.


지형이 배 밑바닥처럼 생겨서 배론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대성당 격인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은 배밑창을 형상화한 구원의 방주 모양으로 건축되었다.


나를 믿으면 그 속이 강물과 같이 가득 차리라고 쓰여 있는 것 같다. 보이는 쪽이 성지입구의 우측이다.


애기단풍나무가 은근히 많다. 왜 가을에 배론성지를 자주 찾는가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소성당 격인 성요셉 성당이다. 바삐 걷는 수녀님 뭔가 급한 일이 있으신가 보다.


황사영(알렉시오) 현양탑이다.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부당성과 조선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비단에 백서를 써 전달하려다 발각되었다.


황사영 현양탕 우측의 순교자의 집이다.


베른성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진포인트이다. 아직 단풍이 시작되기 전이라 조금은 아쉽다. 십자가 뒤쪽에 무명순교자의 묘가 있다.


< 배론성지의 기도 > 이즈쓰다

배론성지의 아침은
지금 모든 게 회색입니다.
맑아지면 세상이 선명해집니다
모든 희미한 것들로부터
분명한 의미로 설 수 있을 때
내가 당신을 부르게 하소서
모든 사악함과 부정함과
나약함과 거짓까지도
넘어설 수 있게 하소서
해서 가장 선해질 때
성심을 다해 기도하게 하소서
편한 나는 불편함을 모릅니다.
풍족한 나는 부족함도 모릅니다.
오로지
나만 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아픔을
알 수 있을 때 하게 하소서
기도는
내가 아닌 다른 이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때 하게 하소서
그러고도 내가
모두의 상처를 나눌 수 없을 때
감당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빠질 때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자과 성신의 이름으로
모든 그릇됨을 떨치고
당신의 발에 입 맞추게 하소서
안배한 길을 묵묵히 걷게 하소서


진복문이다. 초기 천주교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신도들이 이곳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교구춘을 형성하였다.

천주교가 정상적으로 뿌리내렸다면 오늘날 정치화 되어있는 기독교(개신교)보다는 종교가 더 종교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구습에 매인 지도층의 아집과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아둔함이 결국은 천주교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건 곧 기독교가 내외부의 정치세력과 연계해 천주교를 대체해 한국사회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하였다.
기독교는 19세기말 선교와 의료사업을 필두로 백성 속으로 파고들며 교세를 확장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한반도를 통째로 먹으려는 미국의 검은 속내가 기독교의 전파를 더 가속화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했음을 알아야 한다.
태평양 발발 전까지 미국과 일본은 상호 윈윈 하는 관계였고, 미국은 한반도 내 그들의 세력을 넓히는 방편으로 기독교를 지원했고, 일본은 미국과의 묵시적 합의하에 기독교세의 확장을 제어하지 않았다. 적어도 3.1 운동 이전까지는....
초기 기독교의 역할을 펌훼하려는 게 아니다. 득도 많았지만 그로 인한 폐해도 없다고는 할  수없다.
종교는 정치와 연관되면 썩는다.
그건 만고의 진리이다.
종교가 잘못된 정치에 침묵하라는 게 아니라 종교인 스스로가 정치행위의 당사자가 되지 말라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현실 정치는 외면한 채 정치를 이용해 정계에 발을 들이고 그들의 세력을 정치 내에 들여 세를  넓히고 이익을 취하려 한다.
개인의 권력욕과 집단의 물욕이 합쳐진 게 이명박이고 문창극이고 황교안 같은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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