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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밟기

좋은생각/짧은 단상 긴 여운

by 이즈원 2023. 9. 1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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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밟기 > 이즈쓰다

집시 같은 바람이
들꽃 사이를 지나갈 때면
그중에는 바람과 눈 맞아
흔들렸던 들꽃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마음 가는 대로
바람을 따라나선
들꽃이 있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 없다.
모든 걸 소유할 수 없다는 걸
들꽃은 이미 알았을 것이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들을 보내고 나서야
그중의 작은 부분이 내 옆에 남고
그것들로 인해
내 삶이 보석처럼 빛났음을 안다

내 안으로 받아들인 것보다는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한동안 머물렸지만 지금은 없는 것들
조만간  떠나갈 것들...


생각하면 내 안에 속한 거 보단
없어져 버린 게 더 많았다는 사실들

모닥불, 캠프파이어, 오래된 LP판, 고회 엑셀자동차, 곰인형, 낡은 만년필
장지갑, 미정이, 파란색 티셔츠, 처음입은 청바지, 혜미, 가을, 크리스마스의 기억, 그 찻집, 영혼이 전하는 말들, 그 거리....

그 시간들 위로
나이테처럼 겹겹으로 쌓였던
삶의 추억과 손때 묻은 물건들은
내 흔적속
그림자처럼, 돌부처처럼
미동 없이 기억 속을 유랑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의 떨림
그 떨림만큼이나 미세한 파동들
어쩌면 바람 부는 대로
흔들려 주길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때마다
이성은 완벽할 정도로
감성과 본능을 결박하였다.
가끔은
바람결에 전해오는 향기처럼
나지막이 들리는 노랫소리에 묻혀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싶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계절과 만나고 이별하고 싶었지만
세상의 문은 모든 걸 밀어 넣기에는
너무나 좁고 작기만 했다
늘 그 문의 끝만 잡다가
또 다른 계절의 앞에 이른다
나이는
자연스럽게 포기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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