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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가볼만한곳 ] 비운의 왕궁 덕수궁의 겨울

역사와시사/문화유산 답사기

by 이즈원 2024. 1. 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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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궁 덕수궁

덕수궁은 네 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함녕전과 중화전, 석조전과 돈덕전 일원이다.


임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자 선조는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을 임시궁궐로 삼아 정릉동행궁이라 하였다.
후에 경운궁으로 바뀌었다.
민비가 일본낭인에 시해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고 후에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경운궁을 위상에 맞게 확장하였다. 경운궁은 고종 승하 후 덕수궁으로 바꿔 불리게 되었다.


덕수궁은 건립당시 지어진 전각들과 대한제국 선포 시 지어진 중화전, 돈덕전 석조전의 근대식 건물들이 혼재해 있는 궁이다

광명문

덕수궁의 정문 격인 대한문을 지나면
함녕전의 입구인 광명문을 만나게 된다.

함녕전과 덕흥전

함녕전 일원은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과 명성왕후의 신주를 모신 경호전(덕흥전).

경호전(닥흥전)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셔 놓았던 경호 전은 소실 후 다시 지어 덕흥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정관헌

동양과 서양건축양식을 접목한  장관헌인 외국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만들아졌다.

중화문과 중화전

중화전 일원의 입구 중화문이다. 고종은 이곳에 사 대한제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중화전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지어졌다.

중화전 뒤 좌(준명당)우(즉조당)

즉조당은 선조의 임시거처로 인조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다. 임금의 즉위식이 있던 곳이라 즉조라 명명했다

석조전과 준명당

석조전옆 준명당은 고종이 업무를 보는 편전으로 즉조당과 복도로 이어져있다

즉조당 처마와 석어당

즉조당 앞 중층 목조전각인 석어당은 임금이 머물렀다고 붙여진 명칭이며 행궁 당시부터 남아있던 건물로 조선의 지체 있는 양반 가옥의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준명전, 석조전, 돈덕전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려 건축한 건축물들이다.

석조전

스페인 내전 종식 후 19C말~20C초는 열강들의 식민지건설이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1894 청일전쟁
1897.10 대한제국 탄생                            
1902 2차 영일동맹 아시아의 이권을
           나누기 위한 동맹
1905 포츠머스조약
           러일 전쟁 후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에 우선권을 인정
1905.7 카쓰라 태프트 밀약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조선지배를 상호 용인한 밀약
1905.11 을사늑약(외교권박탈)
1907 헤이그 밀사 특파
          (이준 이위종 이상설)

석조전

석조전 일원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지어진 근대 건축물로 엄격한 비례와 대칭이 돋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1층엔 접견실과 서재 2층은 사적공간으로 침전과 거실등이 배치되었다

돈덕전

석조전 뒤편 돈덕전 일원은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지어졌다.

돈덕전은 서양식 영빈관으로 외교사절 접견 및 숙소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함께한 곳이다.

< 덕수궁 그곳에서 >

꽃 피면 더 이쁜데
왜 겨울에만 가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리 답하지

우리 역사가 꽃피었던 시간이
얼마나 되었다고
치이고 차이고 파이고 찔리고
살냉기라도 느껴봐야
덜 미안할 거 같아서라고

단풍 들면 더 이쁜데
왜 겨울에만 가냐고
내게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리 답하지

알지만 나만 즐기면
마음이 더 아플 거 같거든
아픈 역사라도 알게 되면
슬퍼도 감출 수도 있으니
궂은날이면 더 좋을 거 같아서

견딜 만큼만
그 시대를 들어다 보는 거지
서럽지 않을 정도만
그 시대로 걸어가 보는 거지

꽃나무라 당연 꽃 핀 거 같지만
온기와 냉기, 바람, 햇볕, 비, 새똥...
적당하게 보태어져 꽃이 피는 거지
족적 하나하나
수천 년을 잇고 이어
현재가 존재하는 거지

자기 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애국과 매국을 논한다는 건
아라비아숫자도 모르면서
속셈을 한다는 거와 진배없는 거지
(소종 1정, 실탄 200발, 수류탄 1개
감자 5알 좁샬 6되 짚신 1켤레
이게 간도에서 싸우는 독립군들의 6일 치 보급품이었다는데)
나라 팔고 백성들 고혈 팔아  
닭다리 뜯고 소고기 국 처먹으며  
호의호식 하는 놈들이 어떻게 그 맴을 알겠어

그때는 힘없어 그랬다 치자
그래도 민초들은 무식하게 용감했다
지금은 경제대국 국방력 세계 7위
힘없어 미국 없으면 안 된다 하니
그때도 지금도
대가리란 놈들은  
힘없으니 기대야 한다 하고
백성들은
더 이상 쪽 팔리는 짓 그만하자 한다
이놈들아
용감하지 못해도 비굴하진 말아야지

몇 안 되는 열강들은
자기 나라. 국민 위해 열심인데
그중의 한나라 대한민국은
국격도 내던진 채 셀프보신하는 자들로 널려있으니
비운의 대한제국이나
비굴한 대한민국이나
무슨 차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네

끽소리라도 해야 된다
부끄러운 조상은 되지 말아야지

역사란 게 그래
모르니 던져놓은 덫을
생각 없이 밟고 허우적 대고
맥을 끊겠다는 말뚝질에도
해벌레 바보처럼 괜찮다 하면
다음엔 목숨 내놔라 하지 않겠어

( ) 안의 글은 넷플 드라마 도적의 대사입니다


힘이 없던 나라, 세계정세를 읽지 못했기에 한편은 대문을 잠갔고, 한편은 기대려고만 했다. 아시아는 제국주의 야욕 아래 서서히 침몰하던 격동의 시기 한가운데 대한제국이 있았다면, 그 안에는 나라를 일으키려는 사람들과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던 자들도 있었다.

"과거에는 대한에 황제가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이천만 국민이 다 황제요.
제국이 앉은자리는 다 옥좌이며
머리에 쓴 것은 다 면류관입니다."

~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상해판 안창호 선생 논설중에서

백 년 전에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을 지금의 정치인들은 모른다.
그러니 허구한 날 국민과 민생을 팔기만 할 뿐 정작 국민을 위해선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매국노 이완용의 생각은 아직도 많은 자들에게 통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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