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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al hazard,노블리제 오블리제 그리고 똘레랑스

문화,연예/책과의 대화

by 이즈원 2023. 11. 2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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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 성실, 열정으로 평가되는 대한민국의 성장의 이면에는 무지불식 간에 도덕적 불감증이 제로섬(긍정적인 측면의 반대급부로 생겨나는 부정적 측면)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불감증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이러한 현상들을`망가뜨린 것, 모른척한 것, 바꿔야 할 것`의 저자 강인규 님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잘못된 관행들, 무심히, 넘겨버리는 무관심들을 이제는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도덕적 불감증이 대두될 때마다 수식어처럼 언론지면에 나타나는 moral hazard,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두 용어와는 조금 생소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 똘레랑스를 언급해 보고자 한다.

흔히 도덕적 해이로 설명되는 moral hazard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행위를 뜻하는데 처음에는 미국 보험 가입자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일컫는 용어였다가 점차 법이나 제도적 허점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만을 취하거나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떳떳지 못한 행위를 일컫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moral hazard와 유사하게 자주 사용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일컫는 말로 그 유래는 14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백년전쟁당시 영국군에 포위되어 1년이 넘게 항전 중이던 프랑스의 칼레시는 결국 영국에 항복하게 되고, 그 당시 영국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칼레시민의 안전을 담보하는 조건으로 영국에 대항한 프랑스의 책임을 물어 칼레시민을 대표하는 여섯 명의 목숨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칼레시민들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사람이 있겠느냐며 혼란에 빠지게 되고, 한순간 당시 칼레시의 최고갑부인? 사람이 칼레시를 대신해 목숨을 내놓을 여섯 명 중 한 사람은 내가 되겠소 하며 자진해서 나서게 되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등이 자진하게 되는데... 이들의 용기와 헌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 역사사에 의해 기록으로 남게 되고 오늘날까지 영국에선 사회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로 여겨지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사회고위층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이튼칼리지의 젊은이들이 세계대전에 참가 2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기도 하였으며, 우리의 6,25 전쟁당시 참전한 병사들 중 미군 장성의 자제가 백여 명도 더 되었다는 사실들이 어떻게든 군면제를 받으려는 우리의 현실들과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점과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moral hazard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회적 도덕적 책임에 대한 자신과의 책임 및 의무라면 이와 반대로 프랑스에서 유래된 똘레랑스는 약간은 생소하면서도 그 뜻에 있어서도 약간의 차이가 난다.

똘레랑스를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타인에 대한 배려, 이해, 관심의 뜻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공공서비스노조(철도나, 버스)의 파업이나 아니면 우유값 파동과 관련된 젖소사육 축산농가나 쌀값파동으로 인한 고속도로 점거 시 많은 국민들이 그로 인한 불편함에 짜증도 내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똘레랑스적 프랑스인 사고로 보자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행위라 생각하며, 그 불편함을 이해하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우리는 정부가 앞장서 시민들의 교통불편을 이유로 집회 참가자들을 폭도로 몰고 가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똘레랑스적 사고는 내편과 반대편으로 갈라져 소모적 논쟁을 이어가는 우리의 사고와는 배치되는 상호 이해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빠르다.

사실 우리는 반대편의 얘기를 듣는 쪽보다는 내 얘기를 주장하는데 더 익숙해 있다 보니, 서로가 네 편 내 편만을 주장하고 심지어는 나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좌익, 빨갱이, 꼴통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으며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도 모자라 동과서로 재경과 지방으로, 또 보수와 진보 좌익과 우익이라는 애써 편을 갈라가며 서로의 앙금을 덧발라 가고 있다. 아쉽게도 조금 희석되어가나 싶었던 이념 갈등은 윤석열 정부 들어 최고조로 달아올라있다. 윤석열 정부 자체가 이념논쟁, 반공논쟁을 수면 위에 띄워 정부의 실정과 무능함을 상쇄시키는 촉매제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대부분의 국민들의 책임 이라기보다는 무감각한 moral hazard와 무관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없어져버린 국민들의 잘못된 가치관에 기인하여 계속적으로 우리 사회를 분열 속으로 내몰고 있는 측면이 강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지금의 우리의 문제는 그런 것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대한민국의 성장 뒷면에서 멈춤 없이 함께 성장하던 독버섯 같은 현상 중의 하나인 도덕적 불감증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자위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하며, 이러한 기현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세계가 지적하듯 민주공화국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후진성과 비민주성, 공직자의 낮은 청렴도, 세계언론이 얘기하는 한국언론의 불공정성과 비중립성, 국민들 개개인의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가 이러한 도덕적 불감증이 자리하도록 묵인하고 용인해 왔다면 이제는 바꿔야 되지 않을까?

많은 부분에서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라 자처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정신과 민주적 소양 책임의식도 세계속의 대한민국이어야 하지 않을까?

도덕적 해이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똘레랑스로 충만한 세게 속의 대한국인이란 나로부터의 도덕성회복, 사회적 책임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자세로부터 그 출발점을 삼아야 할 것이다.

 

 

인사청문회에 검증을 위해 선 후보들, 국정감사에 등장하는 고위 공직자들,

이들의 한결같은 답변은  "잘 몰랐다."이다.

정말 몰랐던 것 일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았던 것일까?

2004년 11월 미국 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압승할 것으로 예상했던 민주당원들 사이에선 자기반성이 일어났다. 출구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당수 유권자들이 다른 어떤 현안보다 '도덕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투표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압도적인 수치로 부시 후보를 지지했다. 초기 병역면제라는 민주당 후보의 경력이 대선 후보가 결정 난 이후에도 유권자들에게 투표권 행사의 주요 변수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압도적 1위를 달리던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정치초보 윤석열 현 대통령에게 20만 표 남짓 표차로 지게 된다. 그 주요한 변수가 도덕성이었다. 도덕성을 줄기차게 선거 이슈로 부각하며 정의 공정을 내세운 윤석열은 그겋게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결과론이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윤석열 또한 많은 도덕적 흠결이 있고 전혀 정의스럽지도 공정하지 않고, 거기에 무능력까지 탑재하고 있다는 게 지난 2년의 국정운영과 정치력에서 드러났다.


마이클샌덜은 `왜 도덕인가`라는 저서에서 "도덕적 딜레마를 피하려 하지 말고, 직면해서 고민하는 것이 곧 정의"라며 "보수와 진보를 떠나 공정한 사회적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제 우리 사회도 미국이 이전에 경험한 도덕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해야 할 시점이다.

말로만 도덕적으로 완벽한 이 아닌 실제로 완벽해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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