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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 가볼만한곳 ] 역사의 현장 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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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즈원 2023. 10. 1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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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해미읍성(사적 제116호)
#교황프란체스카방문성지
#미스터선샤인촬영지

낙안읍성과 더불어 형태가 제대로 보존된 읍성(고지대에 대부분 세워지는 산성과 달리 평지에 증축)이다.
태종 때 시작하여 세종 때 본모습을 갖추었고 성종 때 와서야 최종증축을 한번 더 했다고 전해진다


왜군의 출몰에 대비해 병마절도사가 읍성에 주둔해 충청서해안 지역의 주요 군사적 요충지로서 200년 이상 유지된 다가 1651년 청주로 병마절도사가 옮겨가 면서 그 중요도가 덜하게 되었다

외벽에는 지역명을 새겨놓았는데 그것은 각 지역별로 성곽공사 책임 할당을 주어 부실공사를 막으려는 의도였다 한다.


8년 전쯤에 잠깐 해미읍성을 들렀으나 그땐 몰랐던 사실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정점에 달해 많은 사람이 죽었던 아픔을 간직한 곳이었다 한다.

진남문
옆에서 본 진남문 망루


진남문은 남쪽의 중앙에 있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사실상 읍성의 정문 격이다.


성곽과 잔디밭 사이의 길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성곽을 한바뀌 둘러볼 수도 있다.


진남문을 들면 정면으로 관아가 있던 곳까지 일직선으로 길이 나있다.


길 좌측에는 당시 사용되던 대포 같은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무궁화동산을 지나면 서쪽문에 해당되는 또 하나의 성문이 보인다. 성곽 위로 올라갈 수는 있으나 성곽을 따라 걷는 건 다소 위험할 수도 있다

호야나무

충남 지정기념물 제172호 호야 나무는 회화나무 종으로 천주교 박해 시 이 나무에 사람을 매달아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읍성 내에는 군영 외에 민가와 가옥도 일부를 복원해 놓았다.


역사적 아픔이 있는 읍성에도 가을은 건너뜀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1800명에 달하는 천주교신도가 죽임을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읍성의 분위기는 너무 평온했다.


조선후기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인식되며 도입된 천주교는 점차 종교적 색채가 강해지며, 제사를 거부하는 등 기존의 사회제도와 부딪히며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1866년 대원군은 초기의 유화정책에서 급변하여 천주교에 대해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병인박해이다. 끔찍한 고문과 처형이 자행되었다고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함께 처형되자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침공해 오게 된다. 바로 병인양요이다.


1868년 옴베르토가 대원군 부친의 묘를 도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으로 천주교 탄압은 극에 다다르게 된다.

국궁장내 이순신동상

국궁장인데 이순신 장군이 해미읍성에서  한 1년 정도 복무했다고 한다.


2014년 프란체스카 교황이 방문하며 유명세를 떨쳤고, 몇 년 전 종영된 미스터선샤인 촬영지로 알려지며 또 한 번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역사는 그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수많은 피의 희생 위에서 오늘에 이른다. 여러 파로 나뉘어 아귀다툼 중인 현재를 보면 아이러니하다는 말밖에.


역사엔 만약이 존재한다. 우리도 당시에 일본처럼 개방정책을 펴 나갔다면.. 한일합방 같은 아픔을 겪지는 않았을까? 답은 그 시대를 산자만이 알 것이다

<서학과 천주교 >

조선후기(17C) 신학문의 일부로 유입된 서학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종교적 색채를 띠어갔다.천주교의 등장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유교에 심취한 기득권과 달리 제사를 부정하는등 기존 제도와 질서에 반하는 천주교가 달가울리 없었다.

세번에 걸친 박해가 이루어졌고, 대원군이 집권하며 초기에는 어느정도 진정국면으로 접어들다가 쇄국정책이 본격화되며 천주교도에 대한 끔찍한 박해가 다시 시작된다.바로 1866년 일어난 병인박해이다.

이때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신부들이 함께 처형되게 되고,이를 빌미로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프랑스군이 조선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 이다.이후 1868년에는 옴페르트라는 도굴꾼이 흥선대원군 부친의 묘를 도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대원군이 천주교를 더 심하게 탄압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끝내 개방을 거부한 우리와 달리 개방을 통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신무기와 서양문물을 흡수한 일본은 후에 조선을 합병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모르나 우리는 같은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역사로부터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들을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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